아침 산책…가족 독서…운동…“코드 뺐더니 즐거움이 켜졌죠
《“나는 나는 TV를 봤었지. 이제 이제 TV를 끌 거야. 코코코 코드를 뺄 거야. 이제 이제 고무줄을 할 거야. 랄라라라∼ 참 재밌겠구나.”
5일 어린이날.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풍아파트에 살고 있는 형지원(5) 양은 거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엄마 아빠 앞에서 유치원에서 배운 동요 ‘TV를 안 볼 거야’를 신나게 불렀다. 이날은 ‘TV 안 보기 시민모임’(cafe.daum.net/notvweek)이 정한 ‘전국 TV 안 보는 주간’이 시작되는 날. 이 운동은 ‘TV 안 보기 시민모임’ 대표인 서영숙(사회복지학) 숙명여대 교수가 이끄는 캠페인이다. 이날 처음 참가한 지원이네 가족은 TV에선 다양한 어린이날 특집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었지만 11일까지 TV 스위치를 끄는 실험에 동참하기 위해 TV 코드를 뽑았다.》
■ ‘TV 안 보기 운동’ 동참한 형성철 씨 가족
○ TV를 안방 장식장 속으로
치과의사 부부인 형성철(40) 한민정(37) 씨는 신혼살림을 차릴 때 거실 중앙에 놓은 TV와 소파 때문에 저절로 TV중독에 빠져들었다고 회고했다.
“어릴 적 섬진강변의 시골에서 자랐는데 동네에 TV가 한 대밖에 없었어요. 자연 속에서 놀 게 워낙 많아 TV를 잘 보지 않고 자랐지요. 치대에 다닐 때도 바빠서 TV를 잘 보지 못하다가 결혼 후 드라마 ‘대장금’에 빠진 후 각종 드라마를 다 챙겨보게 된 거예요.”(한 씨)
형 씨 부부가 TV의 폐해를 가장 심각하게 느꼈던 것은 지난해.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전세 만료 날짜가 안 맞아 1년간 가족끼리 원룸을 빌려 생활을 했던 것. 좁은 원룸에서 TV의 영향력은 그야말로 지대했다. 한 씨는 “밥 먹으면서도 TV를 넋 놓고 바라보고 있는 아이를 보고 한숨이 나왔다”고 말했다.
지난해 11월 새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부부는 거실과 방 배치를 위해 수십 번 도면을 그려가며 고민을 거듭했다. 우선 TV와 소파, 컴퓨터는 모두 안방에 몰아넣었다. TV가 사라진 거실 벽면에는 대형 거울을 붙이고 가족들이 함께 실내에서 운동하고, 책을 읽고,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몄다. 형 씨 부부의 안내를 받아 안방으로 들어가 봤더니 TV는 흰색 문이 달린 장식장 속에 들어가 있었다.
“가끔 외국에 나가 보면 호텔방에 TV 장식장이 있는 걸 봤어요. TV를 안 볼 때는 문을 닫아 놓게 돼 있는 거지요. ‘이거구나!’ 싶었어요. ‘TV 안 보기 시민모임’에서는 TV를 천이나 상자로 덮어두라고 조언하는데 장식장에 넣어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 아이와 놀아주기 함께 해야
형 씨 부부가 ‘TV 안 보기 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은 딸 지원이가 다니는 숙명여대 부설유치원 서영숙 원장의 권유 덕분이다. 서 교수는 15년째 무절제한 TV 시청을 줄이고 그 대신 운동과 독서, 가족 간의 대화, 문화활동 시간을 늘리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유치원에서는 본격적인 TV 끄기에 앞서 1주일간 ‘사전교육’을 실시했다. TV를 끈 뒤 무얼 하고 놀까에 대해 가족끼리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도 가졌다.
“어릴 적 가장 행복했던 추억은 산이나 강가에서 놀던 추억이었어요. 매일 오전 7시에 일어나 아파트 뒷산을 산책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1주일에 한두 번은 꼭 아이와 함께 미술관에 갈 생각이에요. 그리고 거실에 설치한 거울 앞에서 가족끼리 요가나 발레 같은 실내운동을 열심히 할 겁니다.”(형 씨)
1주일간의 사전교육은 벌써부터 효과가 나타났다. 지난주 친척들끼리 모인 자리였다. 사촌오빠들이 다함께 모여서 만화영화를 정신없이 보고 있는데 지원이가 TV 앞에 서더니 “우리 유치원에서는 TV 안 보기 운동을 하고 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촌오빠들과 친척들이 모두 깜짝 놀란 순간이었다. 한 씨는 “요즘은 초등학생들이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인데 어떤 교육을 받는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
‘TV 안 보기 시민모임’에서는 TV 끄기와 함께 컴퓨터 게임과 인터넷 사용 시간도 줄여나가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 씨는 “얼마 전에 비행기를 탔을 때 남매가 티격태격 싸우니까 부모가 게임기를 주었더니 내릴 때까지 아이들이 조용해졌다”며 “부모가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기 귀찮아서, 집안일을 하기 위해 TV 시청이나 게임을 하는 시간을 연장시켜 주다가 아이들이 중독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형 씨도 “아버지들이 집에만 오면 인터넷 게임에 빠져 있는 경우가 예상외로 많다”며 “아이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보드게임을 대안으로 생각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지원이에게 ‘TV 안 보기 운동’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다섯 살 지원이는 짧지만 명쾌하게 답했다. “눈이 나빠지니까 TV를 안 보고 운동하는 거예요.”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